홍성담


라면식사 1979 80 x 53 베니아판에 유채


칼갈기 1979 91 x 72.7 캔버스에 유채


K군의 휴일 1981 145 x 112 캔버스에 유채


바리데기 (1,3,5,7) 1998 194 x 130


담 위에 달, 달 밑에 담 1993


욕조_어머니 바다의 푸른바다가 보여요


사형이 있던 날 밤 1993 65 x 53 캔버스에 유채


창 1991 23 x 17 종이에포스터칼라


이감 1996 53 x 45.4 캔버스에 유채


봄 1993 65 x 53 캔버스에 유채


배식 1996 100 x 210 캔버스에 유채
* 우리시대 리얼리스트의 바람찬 삶 ... 최열(미술평론가)
바르지 못하다. 필자가 홍성담에 대해 쓴다는 것이 멋 적다. 워낙 오랜 세월을 함께 형제로, 벗으로, 동지로 살아왔으니 좋은 말밖에 어디 다른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진달래 넘실대는 무등산 자락 아래서 만나 꿈을 가꾸고 사람을 만나 조직을 만들어 내일을 준비했다. 유신의 어두운 길목에서 만족과 민중 그리고 리얼리즘을 어루만져 화판 위에 서투른 설계사처럼 하나하나 줄을 그어나갔다. 그 설계도면은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찢겨져 타올랐고 우린 그것을 몸과 마음속에 감춘 채 그것이 지시하는 대로 그렇게 행동하면서 지금껏 살아왔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홍성담은 조그만 화실에서 라면냄비를 옆으로 제끼고 꽁초 가득한 재떨이를 끌어당기며 벽 한구석에 붙은 조그만 정물화를 지긋이 보았으므로 필자도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둥근 접시 위에 조기 두 마리가 누워 있는 아주 조그만 유채화였다. 누가 그린 것인지 모르지만 한 50년은 너끈히 되어 보였다. 홍성담은 그 그림이 가슴에 쏙 들어와 영 나가질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때 이 사람이 배고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뒷날 그가 폐렴 3기에 이르러 목포시내 초입 고갯마루에 자리잡은 요양원 한산촌에 입소했을 때 찾아가 만난 우리는 그 이야길 나누었다. 진달래가 흐드러져 꼭 그만큼 달아오른 얼굴로 홍성담은 먼 하늘을 열심히 보았는데, 그때 하늘엔 조기 그림이 없었다. 흐르는 은빛 구름 뿐 이었다. 지긋지긋한 폐렴을 이겨내고 그가 우리 곁에 왔을 때 필자는 홍성담의 집안 내력을 조금 알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화가 김환기, 정치인 김대중이 태어난 곳으로 잘 알려진 전라남도 신안군의 숱한 섬들 가운데 비교적 큰 하의도다. 하의도는 저 유명한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시절 버금가는 어려움을 겪은 이웃 섬이다. 홍성담은 흉흉한 전설을 듣고 자랐는데 철들고 나서 알고보니 그게 모두 섬사람들이 겪은 무서운 사건들을 각색해 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홍성담의 역사의식은 바로 그곳으로부터 시작한다. 홍성담이 대학시절 시작했던 연작 그림「백의민족의 노래」의 터전이 고향 사람들의 발자취였음을 필자는 훨씬 뒷날 깨달았다. 그 그림은 1980년 광주항쟁을 겪은 뒤 작품세계와 달랐고 그래서 그 뒤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것을 새로이 떠올릴 무렵 필자가 어린시절 존경했던 화가 오지호를 다시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선지 몰라도 이제는 화가 홍성담을 생각할 때면 화가 오지호가 떠오른다. 같다거나 대물림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같기도 하면서 또 너무 다른 탓이고 홍성담이 많은 것을 바꿔버려서다. 오지호는 식민지 조선 땅에 심미주의 미학을 굳건하게 심어놓은 뛰어난 작가다. 동시에 그는 지주 집안 출신으로 조국의 운명을 위해 뜨거운 열정을 불사른 파르티잔이었다. 홍성담은 유신과 신군부가 지배하는 땅에 리얼리즘 미학을 굳건하게 심어놓았다. 또 그는 조국의 운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투사요 미술운동을 이끈 지장 (智將)임에 틀림이 없다. 오지호는 미학과 행동을 떼어놓았지만 홍성담을 미학과 실천을 하나로 이뤄냈다. 일찍기 젊은날의 홍성담이 '전투적 신명'을 미술운동의 화두로 내세웠을 땐 같은 진영 안에서조차 과격하다고 했던 또 뒷날 마르크스주의 미학을 내세운 이론가들은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홍성담의 그 화두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진지하며 아름다움을 힘차게 일궈내는 미학적 알맹이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마땅한 상황에 이르렀다. 미술의 힘을 그처럼 적절하게 표현한 예를 필자는 아직 알지 못한다. 홍성담은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왔다. 농촌·공장·가두·화랑으로 몸을 놀렸고 그때마다 홍성담은 어김없이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다. 언술로서의 화두만 내놓은 게 아니라 창작이라고 하는 형상으로서의 화두를 내놓은 것이다. 오윤과 신학철을 빼고 필자는 이념과 미학 그리고 창작에서 홍성담 만큼 미술의 힘을 온전히 재현한 화가를 아직 보지 못했다. 계절이 바뀌어 눈녹고 새순이 터오는 그 무렵 우리는 망월동엘 찾아갔다. 그 많은 무덤 가운데 시인 김남주의 묘자릴 찾아 절을 했다. 홍성담 아버님 형제들이 모두 요절했다는 이야길 들으며, 요절한 시인의 삶을 생각하며, 우리시대 최고의 리얼리스트가 살아가는 바람찬 삶을 생각하며,
* 홍성담
1955 전남 신안 출생 1979. 2. 조선대학교 졸업 1980. 7. 5월 진혼제를 위한 야외전 (나주 남평읍 드들강변) 1980. 11 제 1회 작품전(광주전일 미술관) 1981. 2 2000년전(광주 전일 미술관)/ 1981. 6. 신명을 위하여(광주 송정리 석산야외) 1981. 11. 예맥전 (광주 남도예술회관) 1984. 2. 오늘의 판화 13인전(서울미술관) 1984. 8. 해방 40년 역사전 (서울, 광주 대구, 전주) 1987. 5. 反고문전 (광주 카톨릭 미술관) 1987. 6.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1987. 8. 통일전 (서울 그림마당 '민') 1988. 6. 홍성담 판화전 (독일-HENKE 갤러리) 1989. 3. 광주민중항쟁 연작 판화전 1989. 4. 홍성담 판화전 (마산 YMCA) 1989. 5. 5월 미술전 (광주 남도미술관) 1989. 6.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전국순회전 1989. 11. 홍성담 판화전 (광주 카톨릭미술관) 서울그림마당 '민'/ 전주 온다라 미술관/ 목포 카톨릭 회관 1990. 3. 홍성담 판화전 (미국LA 홍성담 구명위원회) 1990. 11 홍성담 판화전 (양심수를 위한 독일HAMBURG재단) 1992. 5. 5월 민중항쟁 연작 판화전(전주 온다라 미술관) 1994. 3. 민중미술15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1994. 5.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서울 예술의 전당) 1994. 10. 「물 한방울, 흙 한줌」전 (서울, 광주, 부산)
by 새벽날개치며 | 2006/11/09 23:57 | 국내미술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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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ukcho at 2012/11/19 04:16
우하하하!!! 홍성담개잡놈아!! 홋찌가찟저질정도로,가난한집구석에서 태어난 홍가자슥아!,너거애비 형제들은모두가,
간첩질을하다가 천벌을바다 뒈졋따문서?? 이씨부럴종자야! 네놈썅통에 염산을 부어버려?? 네놈!폐렴3기때 뒈져뿌렷써야햇는데,국가를좀먹는 버러지인간아!! 너가튼놈때문에 국민대통합이안되는거시야!! 3대가벼락마져돼질종자야! 전라도
사람들이 너가튼패륜아때문에 도민전체가 욕을먹는거야!! 씨팔놈아!! 넌! 사고방식을 바꾸지안으면, 염산에 위력을,보여
줄께, 잡놈아!!
Commented by 김정일 at 2012/11/21 20:32
이런 놈을 화백이라하나?
정신병원에서 개한테 할켜야할 짐승같은 인간을.....
그림들 봐라 이 인간의 머리상태와 사상ㅇㄹ 볼수있지 않은가 어둡고 칙칙하고 썩은 내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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