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광욕 - 이문재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 현기증 - 이문재
잎새 다 뜯어 낸 감나무, 알전구 같은 홍시들을 달아 놓고 있다 죽어 간 이들 낯빛 환하게 떠오른다 묘지 입구, 공휴일에 나 앉아 죽음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을 바라본다 양지녘에서 나는, 녹슬기 직전 파르르 치를 떨 강철을 생각하고 있었다 습기의 불결함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내 몸 이 두터운 녹의 더께는 무엇인가 공원묘지 입구, 제 살들을 뜯어 내며 감나무는 제일 큰 나이테를 얻는다 이 땅 위로 세기말이 간다 가고 있다, 아니 오고 있다 내 녹의 덕지덕지함에 진저리쳐진다 구멍난 오존층처럼 내 믿음이 남극 위에도 '아메리칸 만한'구멍이 생겼나 보다, 아직도 나는 저 죽음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익은 감 하나 아무 일도 아니듯 투신한다 영구차가 뽀얀 먼지를 일으킨다 * 고요한 나날들 - 이문재 포장을 뜯지 않은 건전지처럼 가만히 기다리자 꽃상여가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 그 안에 관은 없다 사람들이 집을 비운 마을의 한낮은 고요하다 펼쳤던 손을 자르고 아래로 내려간 겨울 나무들 바람의 안쪽은 말라 있고 그 맨 앞은 보이지 않는다 꽃상여를 불태우며 없는 죽음을 죽이는 사람들이 활기차다 자물쇠 채워진 우물물이 조금씩 고이고 돌아와 누운 집들이 깊숙해진다 더 기다리자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 * 거울 - 이문재
모든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유리창은 늘 차갑다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아서 거울은 모든 것을 되비춘다 유리의 막힌 한쪽 거울의 뒤쪽 거울은 따뜻하지 않다 내 살아온 날들은 내 죽음이 함께 살아온 날들 이렇게 살아 있음의 뒤켠이 바로 나의 죽음 거울의 배면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 변산 숙모의 소리 - 이문재 거울을 오래 보지 말아라, 그 속에 전혀 다른 사람 너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터, 거울이 혼을 앗을 터이니, 오랜 거울 삼갈 일이다, 큰 싸움 일어난다. 뒤척이지 말아라, 꿈자리 첩첩 적막일 때에도 한컵 우유 같은 반투명으로 시야를 가릴 일, 아침에게 미안해 하지 말아라, 꿈 또한 큰 화 불러 모으지 않느냐
그리움, 변산 앞 가을 뻘처럼 펼쳐져도 발 들여놓지 말아라, 뻘은 산 자의 자궁 아니니, 그리움 발 앞에 던져두고 썰물 밀물 건너다보아라, 하여 그 뻘 같은 그리움에서 나문재 한 포기라도 돋아난다면, 살 만하다고 하여라 그리움에서 힘 얻는 삶 있다면 그가 스승이다. 여기 식구들 있고 저기지기들 있다 더 많은 타인들 있다. 거울 속으로 드느냐 꿈의 안깃으로 지나가느냐, 매양 아침인 것이 서러워 채석강 단층처럼 쌓이기만 하느냐, 속절없이, 가락도 안되는, 음향을 부여잡고, 그래, 아침의 옆으로만 난 길섶에서, 그래, 주저앉자는 것이냐. 거울, 조심하거라, 어느 때 보면 그 안에 모든게 있더라, 그래서, 오직 네가 그 거울을 볼 일이다
거울 밖, 꿈의 바깥 - 이문재 시집, “산책시편”(민음사, 1993, 2001년 신장판에서)
![]() * 봄은 수직한다 - 이문재
가장 큰 감옥은 내 안의 감옥 창이 없는 감옥 낯익은 감옥 두근거림이 지워진 감옥 그곳이, 그때부터가 가장 커다란 감옥 감옥에서 봄 맞을 때 내 몸 밖이 왼통 봄일 때 봄들이 태양과 수직하는 장면을 나는 보았다 태양과 수직하지 않는 봄은 봄이 아니었다 봄이 나의 감옥일 때 나, 보았다 태양과 일직선으로 만나지 않는 봄 봄이 아닌 것을 온몸으로 태양을 만나지 않는 봄은 봄이 아닌 것을 몸 전체가 몬 전체로 아프지 않은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또 보았다 태양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봄에게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또 보았다 그대를 正面하는 내 두 눈 새카맣게 타들어오는 것을 감옥 전체가 불타는 것을 온몸뚱아리가 새카맣게 무너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여 봄이 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최단거리로 그대 향하는 두려운 두근거림 뜨거운 낯설음을 * 사방이 자욱해지면 - 이문재 사방이 자욱해지면 내가 중심이 된다,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맨 앞이고 맨 뒤이다 어깨죽지 축축해지는 봄비 멎자 그 틈새로 안개가 밀려와 시멘트처럼 굳는다 이 들끓는 봄날은 수시로 나를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안 보이면 없는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이 습관도 무섭다, 사방이 자욱해지면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움직이지만 사방이 캄캄해지면 누구나 움직이는 한가운데, 아니 한가운데인 변방인 것, 방향제만 같은 그대 그대의 발언은 어디에서 흩어져 오는가 자욱해지는 것인가, 이 봄날은 꾸역꾸역 안개를 피워댄다 봄날은 안 간다. * 신새벽 - 이문재
공중전화 부스, 새벽 한 시 벚꽃 폭설 술김에 아이들 아이들 이름, 또박또박 부르며 수화기를 집어든다 아들아-- 밖에는 봄 밤 폭설 밥 먹었느냐, 밥들은 먹었느냐 수화기 저쪽은 캄캄하다 밖은 환한 봄밤 목련나무는 제 꽃잎들 흐릿한 투신을 물끄러미,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그러고보니 집 전화번호를 누르지 않았구나 새벽 두 시, 부스 안은 지린내 딸아-- 돈 벌어, 곧 가마 기우뚱, 지구가 한 바퀴 돈다 * 마음의 오지 -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거미줄 - 이문재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있다 ![]() * 저녁 산책 - 이문재 마음은 저만치 흘러나가 돌아다닌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텅 빈 몸 속으로 밤이 들어찬다 이 항아리 안은 춥다 결국 내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신발끈 느슨하게 풀고 저녁 어귀를 푸르게 돌아오던 그날들 노을빛으로 흘러내리던 기쁜 눈물들 그리움으로 힘차하던 그 여름 들길들 그때 나에게는 천천히 걸어가 녹아들 저녁의 풍경이 몇 장씩 있었으나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은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몸 바깥, 창궐하는 도시 밖으로 나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텅 빈 항아리에 금이 간다 어둠이 더 큰 어둠 속으로 터져 나간다 * 푸른 곰팡이 - 이문재
- 散策詩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 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 이문재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 보면, 눈물의 그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 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 해남길 저녁 - 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넒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막이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 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 이 땅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 * 노독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며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 ![]() * 길 밖에서 - 이문재
네가 길이라면 나는 길 밖이다 헝겊 같은 바람 치렁거리고 마음은 한켠으로 불려다닌다 부드럽다고 중얼대며 길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푸른잎새들이 있다 햇살이 비치는 헝겊에 붙어, 말라가는 기억들 가벼워라 너는 한때 날 가로수라고 말했었다, 길가 가로수 그래, 그리하여 전군가도의 벚꽃쯤은 됐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봄날의 한나절 꽃들의 투신 앞에서 소스라치는 절망과 절망의 그 다음만 같은 화사함을 어쩌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길의 밖일 때 너는 길이었다 내가 꽃을 퍼부어대는 가로수일 때 너는 내달려가는 길, 아니 그위의 바퀴 같은 것이었으니 오히려 길밖이 넓다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넓고 넓다 * 등명(燈明) - 이문재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 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 심지의 힘으로 맑아져 작은 등명이고 싶었다 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 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 등명리에 밤이 오고 바다의 천정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 불빛에 가려 깊은 밤그늘이 되어도 좋았다 질문을 만들지 못해 다 미쳐가는 어떤 간절함이 찾아왔다가 등명을 핑계대며 발길질을 해도 좋았다 좋았다 심지 하나로 꼿꼿해지면서 알았다 불이 붙는 순간 죽음도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좋았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라는 어떤 그리움이 찾아와 오래된 심지에 불을 당길 터 * 농업박물관 소식 - 이문재 - 목화 피다 아침을 거르고 나와서 오전 10시께 혼자 가정식 백반을 먹었습니다 왼쪽 구두코를 들어 오른쪽 바짓단 뒤에 문지르다가 어라, 농업박물관정문이 열렸길래 발길을 돌렸습니다 농업박물관이라 -불과 30년 사이에 농업은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박물관에 들어간 꼴이지요 내 아들은 학교에 들어가서 농부였던 할아버지를 농업박물관에서 관람하겠지요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막 목화가 벙글고 있었습니다 벙글어서 하얀 솜을 내밀고 있는 목화는 고체에서 바로 기체가 되는 승화처럼 보였습니다 꽃에서 곧바로 솜이 되는 꽃 - 우리 아버지는 목화였습니다 이 아들을 거쳐 손자에게 가지 못하고 곧바로 박물관으로 가신 것이지요 나는 농업박물관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혹 모르지요 내 손자가 이 할애비를 도시박물관에서 찾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목화밭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회사로 들어가려는데 느닷없이 은단이 먹고 싶었습니다 은단 - 그러고 보니 가을날 오전의 햇빛이 은단처럼 반짝이며 굴러다녔습니다 나는 은단을 한 움큼 집어넣고 우두둑 우두둑 씹었습니다 또 모르지요 나의 태어나지 않은 손자는 먼 훗날 이 할애비를 회사박물관에 가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지요 모르지요 * 농업박물관 소식 - 이문재 - 식탁에서 길을 묻다 『토지』가 완성되던 해 여름, 박경리 선생댁에서 풋고추 한줌 얻어왔더랬는데요, 원주 시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그 고추가 먹고싶어 안달이 났더랬습니다, 서울로 가던 차에서 내려 아무 식당으로 들어갔지요, 식탁에 앉자마자, 막된장부터 달라고 했지요, 아,『토지』가 키운 토지에서,『토지』를 키운 토지에서 땡볕을 받고 자란 그 풋고추는 달았습니다, 달고 매웠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풋고추에 관한 한 매우 까다로워졌습니다, 그날 먹은 풋고추만한 풋고추를 나는 아직 맛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식탁에 앉아 가끔 식탁에 올라 있는 것들이 내 앞에 오기까지 거쳐온 길들을 묻곤 합니다, 식탁에 올라와 있는 동식물들의 고향의 사정을 넘겨짚어보곤 합니다, 살을 빼야 한다는 딸애에게 이 질문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있습니다, 나처럼 식탁에서 중얼거리다 보면 다이어트가 아니라 아예 단식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 언제『토지』풋고추 같은 아름다운 음식을 반길 수 있을까요, 언제 먹을거리들의 고향과 그것이 지나온 길이 투명해질까요 * 시 월 -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 어슬렁거릴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시 - 류신(문학평론가)
이문재는 '도보 고행승'을 꼭 빼어 닮은 시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사막이나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고행승의 선(禪)적인 포즈를 흉내내지 않는다. 또한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방랑시인의 음풍농월을 따라 부르는 법도 없다. 오히려 그는 느슨한 산책을 좀처럼 허가하지 않는 도심의 한복판을 걸으며 현실의 풍경을 세세히 돌아 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부분 어슬렁거릴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비롯된다. 속도와 능률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중심에서 그의 시적 모반의 전략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도시를 다음처럼 규정한다. "느림보는/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도시에게 당하고 말지요/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 ―散策詩 3').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는 빠른 것이 미덕이된 우리 사회의 숨가쁨과 헐떡거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반석(盤石)으로 깔려 있다. 발전을 위한 발전, 그 무한 질주의 급류 속에선 누구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기 마련이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이런 광(光/狂)적인 스피드에 휘말려 그 흔적을 감추기 십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속도 숭배의 폐해와 위험성에 제동을 걸고, "게으른 사람은 힘이 세다/아프도록 게을러져야 한다//…/게으른 사람만이 볼 수 있다"('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고 당당히 말한다. 전진만 있고 역진(逆進)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그 직핍한 세상을 천천히 에둘러가며 속도의 에스터시에 파묻혀 있던 삶의 진실과 실상을 찬찬히 끄집어낸다. 우리들은 지금 아주 아주 바쁘게, 지나치게 조급하게, 너무나도 조바심치며 앞으로, 앞으로만 줄달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시인의 말대로 '경부고속도로'에서 초고속 '정보고속도로'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지 않은가. 어디 한 곳, 오랫동안 편안하게 눈맞춤 할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변화면서 질주한다. 지속이 없다. 순간적으로 지지고 볶는다. 식은 땀을 흘리며 이리 저리 뛴다. 그래서 "깜빡거리는 것들은, 위험하다/엘리베이터 표시등, 병원 약국의 번호판/횡단보도 신호등, 카드공중전화의/액정화면, 컴퓨터 커셔……/이것들이 무시로 깜빡거리며/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버린다"('저 깜빡이는 것들'). 실로 끔찍한 세상이다. 우리가 이문재 시인의 조금은 헐겁고 느슨한 사색의 소롯길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다림'의 시학과 '느림'의 미학으로 구축된 그의 시의 풍요로움이 가만히, 여유 있는 보폭으로 다가온다. * 이문재
59년 김포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82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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