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집


* 꿈이 사라진다는 것은 - 신동집

꿈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서서히.
그러나 꿈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사실이다.
얼룩진 아침노을의 식은 열이 되어
때로는 그러한 흙비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꿈이 사라진다는 것은
또 한번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서서히.
그러나 꿈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다시 한번 사실이다.
덜렁이는 남루의 자락이 되어
절룩이는 흙발의 막대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정중히 일어서
마중을 할 일
맞아서 말 못할 회포나 풀 일
한때는 보듬던 꿈이었으니
그런 날의 향기였으니.
* 새벽녘의 사람 - 신동집

아침 노을을 안고
새벽녘의 사람은 서 있다.
누구인지 나도 잘 모르는데
지평선에 한 발을 걸치고
뒷모양은 여전 움쩍도 않는다.
이대로 언제까지?
한 번은 그도 몸을 일으켜
해 짧은 날의 들판을 건너가리라.
새벽녘의 사람은 빨리도
해지는 기슭의 사람이 되는가.
아침을 닮은 저녁 노을의
불의 흔적도 마저 거두며.


* 목숨 - 신동집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어라.
너랑 살아 보고 싶어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어라.

억만 광년의 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표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한많은 時空이 지나
모양할 수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서라.


* 오, 하나씩의 이름들 - 신동집

오, 하나씩의 이름들
무시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름들
돌이며 길, 들이며 강
물이며 나무, 별이며 무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름들.

이들은 결국
하나씩의 암호였던가
우리들의 삶의 융단천
그둘레 안으로
누구인가 짜넣은
암호였던가.

우리는 저마다의 암호를 안고
이 지상을 살다 가는것이리라.
조금씩은 나름으로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하며,
그리곤 다시 한번 풀기 위하여
깨어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 地球여 - 신동집 -

외롭다는 이 상투어
詩語에서 지운 지도 이미 오랜데
이 밤은 웬일일까
외로운 地球여
하고 나는 뇌어 본다.

외로운 地球여
하고 다시 나는 뇌어 본다.
믿었던 자식이 여태
헤매이는 탓일까
마음도 잡지 못하고.

커다란 물음이 하나
玄暗의 저켠에서 건너온다.
떳떳이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 별에 나는 산다고.

그렇다, 마음 낮게 살다가
성실히 분에 맞게 살다가
생을 마칠 사람이 있는 동안은
地球여, 너를
希望이라 불러도 되는가.


* 귀한 이 한때 - 신동집

바람은 일제히
나를 향해 노래하고 있다.
찰랑이는 이 지상의 빛 무늬
있다는 것은 이대로
소중한 기쁨이다.
흔들리는 풀잎을 따라
나도 흔들리고 있으면
바람은 여전 나를 향해 젊다.
나는 젊지 않아도
산란마친 잉어는 저만치
철교 걸린 강물을 가고
서둘며 날으는 제비들의 모습
조금씩 나도 죽어가는 것일까?
죽어가며 조금씩
내가 되어가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우랴. 귀한 이 한때.
찰랑이는 햇빛과 바람
풀잎이 나를 노래하고 있으니
한동안 무한을 보는 사람
나는 기쁘다고 말하마.
해그늘은 이내 밀려도
멀리서 지상을 덮어 내려도.


* 하나의 슬픔 - 신동집

하나의 슬픔이 태어나기 위해선
적어도 1억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의 슬픔이 삭기 위해선
적어도 노래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1억년의 시간이 또한 필요하다

하나의 슬픔이 타락키 위해선
타락하여 달짝한 설탕물이 되기 위해선
얼마나 또 시간이 필요할까

암층 속에 박힌 고생대
화석은 이를 알리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이를 알리라


* 어떤 사람 - 신동집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매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 눈 - 신동집

아주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눈의 것
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
이 감정 속에 묻혀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
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 마지막 希望 - 신동집

사랑이란 말은 당분간 안 쓰마
이 때묻은 말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때로는 음모
흥정이 숨어 있는 이 말을,

이 말이 정 필요하다면
오히려 벙어리가 되마
그러나 이 말 없이는 어찌
태양은 뜨랴
밤하늘에 별은 반짝이랴

바람은 어찌 나무와 속삭이며
비는 땅과 속삭이랴
이 말 없이는 또
꽃은 어찌 피고 지랴

처음부터 이 말의 깊이 속에서
우리는 사는지 몰라
어쩌면 마지막 希望으로
이 말의 깊이에서 사는지 몰라


* 무엇을 위한 진혼인가 - 신동집

자꾸만 뒷등이 부시다
뚫어지게 나를
누가 보고 있는 탓일까.
그런 대로 새로이 엮는
이 꽃다발
잘나도 못나도
이 꽃다발.
무엇을 위한 진혼인가.
돌아와도 이미 아닌 나를 위하여
천의 눈은 잠 없이 기다리고 있다.
실인즉 한 사람의
눈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이웃들은 다 어디로 갔나
아무 데도 보이지 않고
땅에 떨어진 씨앗은 다
어찌 되었나
풀 한 포기 나지도 않고
텅 빈 태양의
눈만 내려다볼 뿐이다.
손에 쥔 건 여태
해묵은 신문이었구나.
율리시이즈, 나와 함께 가자
허상에의 길은 멀다
율리시이즈, 나와 함께 가자.


* 인사 - 신동집

정오에 뜬 해는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
기울어서 다음은 어찌 되었는가.
일러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 있는 사람은 가벼이 떠나고
내키면 돌아올 듯 쉬이 떠나고
아닌 몸은 남아 웅크려
궂은일에 골몰을 한다.
하찮은 풍경에도 정중히 인사를 하라.
누구도 아닌 너의 자리서
나름으로 경건히 인사를 하라.
무시로 돋아나 가시 아픈 자리도
그러면 소중히 간직을 할 일,
남은 일의 마무리에
남은 정을 다 할 일,
이것이 가장
훌륭한 너의 자세다.
별로 신기하지도
귀하지도 않는 별 아래
태어나고 늙어갈 그런 너라면
사랑하고 죽어갈 그런 너라면.
* 신동집

1924년 대구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아시아 자유문학상('54), 한국현대시인상('80), 대한민국문화예술상('81)
시집 <대낮> <여로> <누가 묻거든> 등
이흥덕 그림 - 화가의 꿈

by 새벽날개치며 | 2006/01/02 05:37 | 시집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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