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 초상정사(草上精思) - 이형기
풀 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 내 작은 가슴을 고이 스쳐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뚝뚝 져버린 듯이
한없이 나를 울리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 황혼 - 이형기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 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 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도 가공되기 이전의
원유같은 목청으로.


* 가슴 1 - 이형기

나의 가슴은 동굴처럼 비어 있다
흉벽이란 이름뿐
메마른 판자 한장으로
겨우 뚜껑을 해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낮시간엔
넥타이를 맨 신사복 차림의 그 속을
감히 헤쳐볼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것저것 풀어놓은 한바중엔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버린다
불가불 나 혼자
겁먹은 눈으로 들여다보는 심야의 공포.....

분명 거기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꿈도 추억도
심지어는 심장마저도 모조리 삼켜버린
악어처럼 크게 입 벌린 어둠
어둠 한마리밖에는

온몸에 오싹 소름이 끼치는 찬바람이
지구 저쪽에서 불어오고 있다


* 호수 -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이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 그해 겨울의 눈 - 이형기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맥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에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 다시 사해 - 이형기

그 바다는 마르고 싶어한다
물기를 모조리 날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해마다 20센티씩
水量이 줄고 있는 그 바다의 자의(自意)의 증발
요단강의 민물이 주야로 흘러들어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것은 그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사는
한 마리 괴물의 소행이다
그 바다가 완전히 마르는 그날이
지구 최후의 날임을 놈은 잘 알고 있다
그날 말라버린 지구의 유적 위에
거대한 소금기둥 하나를 세우려고
놈은 그런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꿈
터무니없으니까 그것은 진짜다
진짜 꿈이다



* 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 - 이형기

너와 나는 많이 다르게 살았다
너는 처음부터
전통의 결 고운 슬픔을 가다듬어
비단을 짰지만
나는 비틀비틀 갈지자걸음
마냥 어지럽고 위태위태하다
그러나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보냐고
이심전심 대수롭지 않게 지나다가
갑자기 네가 훌쩍 이승을 떠났고나
순서도 뭣도 깡그리 무시하고
그렇게 함부로
멋대로 가기냐 해봐도 소용없는 곳으로
실상은 내가 먼저 쓰러져 누웠지
문병 온 너를 속으로 부러워하면서
나는 중국으로 침 맞으러 떠났다
그새를 못 참고
더구나 내게는 기별도 없이
가버린 너
순서부터가 틀리지 않느냐
평생 시만을 써온 너의 그 계산법은
나도 시를 쓰지만 모르겠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
그것이 이제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
또는 바람의 장미꽃이 되어
너의 무덤 위에 찬란하고나
이름 한번 불러보자
아아 박재삼!
이왕 갔으니
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
* 코스모스 - 이형기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는 肉身.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 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였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 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

*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한밤중에 핀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또록또록 눈 부릅뜨고 핀다
칼로 벤듯 아프게 낯빛 그리운 해바라기
그것을 삭이면서 캄캄하게 핀다



* 나팔 소리 울리는 마을 - 이형기

나의 귓바퀴 뒤에는 마을이 하나 있다
성냥곽에 담아도 될 만한 작은 마을이다
추수가 끝난 지 오랜
사람없는 들판 논두렁길에
고장난 경운기 한 대 버려져 있다
그것은 지난 겨울 개미집을 찾아온
늙은 베짱이처럼 처량하다
갑자기 나의 손가락 끝에서
솟아나는 불꽃
한 시대 전의 소방차가 달려와서
물을 뿜는다 누가 우는가
그래도 아무것도 젖지 않고 뽀송뽀송
건조한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나의 고막 속에 가득 울려퍼지는
날카로운 나팔소리를 들어라


* 비 오는 날 -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너머 산 너머서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 낙화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激情)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절벽 - 한국일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우리 현대시의 한 명편 「낙화」의 시인 이형기(65)씨. 94년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5년째 투병중인 이씨가 시집 「절벽」(문학세계사)을 냈다. 49년 열여섯살에 「문예」지로 등단, 현대시사에서 최연소 등단의 기록을 세운 이씨.「절벽」의 시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운명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50여년 시력에서 우러나온 원숙미로 결정된 작품들이다.

이씨는 지팡이 짚고 집 부근을 산책하는 정도일뿐 나들이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투병생활에서도 시작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절벽」을 『죽음을 생각하고 쓴 시들』이라고 말했다. 서문에서 그는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풀어놓았다. 『시인의 사망기사에 속지 말아라. 이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의미있는 시인들은 모두 그대의 은밀한 시간 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모든 존재는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존재는 시인이다』.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 그에 대한 성찰은 지난 해 사망한 시우 박재삼(朴在森)을 기리는 「이름 한 번 불러보자 박재삼」에서 보인다.「그새를 못 참고/더구나 내게는 기별도 없이/가버린 너/순서부터가 틀리지 않느냐/평생 시만을 써온 너의 그 계산법은/나도 시를 쓰지만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모르겠다』면서도 「시인의 계산법」을 일러준다.「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그것이 이제는/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또는 바람의 장미꽃이 되어/너의 무덤 위에 찬란하고나」.

투병중에 돌아본 유년의 기억, 역사에 대한 반추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한 허무롭고도 두려움 섞인 성찰로 이뤄진다.「병마용(兵馬俑)」에서 그것은 「이천 삼백 년 동안 잠자다 깨어났다/깨어나 보니/그들이 지켜야 할 최고사령관/황제는 이미 한 줌 흙먼지로 돌아가/종적이 묘연하다」는 허망의 자각으로 드러난다. 심지어 「혼자 은밀하게 선언한다/-나는 멸망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미래를 믿지 않는 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역시 시인의 계산법은 돌아가야 할 「집」을 마련해 놓았다. 이시인은 그것을 강심(江心)에서 본다. 모든 티끌이 씻겨나갈 수 있는 아름다운 자리, 그 곳에 그의 마음은 이미 가 있다. 시인의 집이다.

「나의 집은 흐르는 강물/그 먼 강심에 있다//크기는 넉넉한 두 평 단칸/들어앉으면 물의 흐름에/절로 손발이 씻기는 깨끗한 그 방/모래로 된 책도 몇 권 있다//별빛을 등불 삼아 그 책장을 넘기면/위잉 위잉 후루룩 위잉/그렇다 그것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세상에서 가장 크게 울리지만/실은 침묵만을 낳고 마는/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그 소리 선연하게 들려오는/강심에 있는 단칸방/나의 집」(나의 집전문).
* 이형기

1933 경남 진주 출생.
동국대 불교과 졸업.
1949 <<문예>>지에 시 <비오는 날> 외 2편으로 등단.
1957 제2회 한국 문학가 협회상 수상.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 <적막강산> <돌베개의 시> <꿈꾸는 한발(旱魃>
<풍선심장> <보물섬의 지도> <그 해 겨울의 눈> 등


금동원 그림 - 흐르지 않는 시간 속으로
by 새벽날개치며 | 2006/03/02 21:07 | 시집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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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ydepark1 at 2006/03/03 08:21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시인은 이 귀절로 대개 기억되지요. 돌아갈 때 뿐 아니라, 돌아갈 곳도 이미 정해 놓았군요.
Commented at 2006/03/03 08:24
비공개 답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3/03 09:03
비공개 답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3/03 09:26
비공개 답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3/03 10: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3/0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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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6/03/04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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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진경옥 at 2006/07/03 02:29
절벽/이형기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 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병석에서 쓰신 이형기 시인의 절창 한 편 올립니다.
Commented by 새벽날개치며 at 2006/07/03 06:47
아, 좋다...
고마와요. 진경옥 시인님.
이것 포스팅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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